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7세 (문단 편집) === [[로마노스 1세]]와 아들들 === [[919년]] 3월 25일,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함대]]를 이끌고 부콜레온으로 와서 해상 대문을 통해 황궁에 들어가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1달 후,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 [[엘레니 레카피니]]와 콘스탄티노스의 결혼식을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르고 그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됨으로써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대 레온 포카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근거지인 크리소폴리스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제위를 찬탈하려는 바실레오파토르의 손아귀에서 어린 황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로마노스는 [[사제(성직자)|사제]]와 [[창녀]]를 비밀 첩자로 활용하여 황제의 위조 서명이 있는 문서를 널리 퍼트리게 했다. 그 내용은 콘스탄티노스가 장인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며, 레온 포카스는 반역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곧 체포되었으나 창녀는 임무를 잘 완수해 레온의 병사 수백명이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레온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도망치려 했다가 비티니아의 어느 마을에서 붙잡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왔다. 이 가련한 [[역적|반역자]]는 그 후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노새]]를 타고 광장을 돌았다. [[920년]] 여름, 로마노스는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협조하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결혼에 관한 최종적으로 수정된 교회법이 포함된 '토무스 우니오니스(Tomus Unionis)'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재혼]]은 완전히 합법적이고 삼혼도 나이 40살 미만의 아이 없는 [[홀아비]]의 경우 회개하는 조건 하에 허락되지만 사혼은 어떤 상황에서도 금지되며 사혼을 한 사람은 그 [[배우자]]와 영구히 결별할 때까지 [[파문]]에 처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았지만 레온 6세의 삼혼과 사혼은 훨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고 콘스탄티노스의 위상은 훼손되었다. 1달 후, 조이 황태후는 [[누명|로마노스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삭발]]당하고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뒤통수|로마노스를 초청했던 테오도로스도 동생 시메온과 함께 체포되어 아나톨리아 북서부로 유배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노스의 아군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15번째 생일 며칠 뒤에 로마노스를 부황제로 임명했고 3달 뒤인 920년 12월 17일에 로마노스의 머리에 황제 관을 씌워줬다. 이로서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로마노스 1세]]로서 제위에 등극했다. 이제 콘스탄티노스의 운명은 조만간 끝나는 듯했다. 로마노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어린 황제를 죽여버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노스는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이름 뿐인 황제로서 목숨을 부지하는 걸 허용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로마노스의 딸인 엘레니는 콘스탄티노스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콘스탄티노스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면 기꺼이 앞장설 각오를 다졌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덕분에 무탈하게 성장했다. 그는 몸이 약한 대신 정신력이 뛰어났고 예술적이고 지적인 분야에서의 관심 폭이 넓었다. 그는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며, 하루에도 몇 시간씩 동로마 궁정 예법을 지켜봤다. 그는 이 시기에 <궁정 예법>(Περὶ τῆς Βασιλείου Τάξεως)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이 서적은 현재까지도 매우 귀중한 사료다. 또한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921년]] 5월 로마노스가 맏아들인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를 공동 지배자로 내세웠을 때, [[925년]] 로마노스가 다른 아들 2명을 황제로 만들면서 총 5명의 황제가 공존하는 상황을 연출했을 때, 심지어 [[927년]] 로마노스가 흐리스토포로스를 서열 2위로 올리고 콘스탄티노스 본인을 서열 3위로 밀어냈을 때에도, 콘스탄티노스는 항의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런 불평 없이 유순하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함으로서 로마노스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러한 굴욕을 가슴 깊이 새겼고 '로마노스 패거리들'의 야만성을 혐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